예상대로 1위였다. 우려했던 편파 판정 의혹도 어김없이 불거졌다. 20일 새벽(한국시각)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동계올림픽 여자 피겨스케이팅 싱글 쇼트프로그램 경기에 출전한 김연아가 무결점 연기를 펼쳐 기술점수(TES) 39.03점과 예술점수(PCS) 35.89점을 얻었다. 총점 74.92점을 받은 김연아는 출전 선수 30명 중 1위로 경기를 마쳤다.

'디펜딩 챔피언' 김연아의 선전은 예상했던 결과였다. 올림픽 직전 열린 'KB금융 코리아 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에서 80.6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얻어 자신감을 충전한 김연아는 지난 13일 소치에 도착한 이후 실시한 훈련에서 모든 점프 성공률을 90% 이상으로 끌어올리며 기대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보조 링크에서 이틀간 연습을 마친 김연아는 쇼트트랙 빅매치가 열리던 지난 15일, 국가대표 응원단으로 변신하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국내 후배 선수인 김해진과 박소연의 연습 경기를 지켜보며 힘을 불어넣어준 김연아는 이날 오후 이상화, 박승희 등 빙상 선수들과 함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를 찾았다. 

'올림픽 2연패'보다는 동료 응원이 우선

자신이 연기할 경기장에 먼저 들어가 관중석 분위기와 조명 등을 살피며 간접적으로 적응을 마친 김연아는 당일 출전한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을 응원하며 한 템포 쉬어 갔다. 시합 직전까지 연습에 몰두하던 4년 전 밴쿠버올림픽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였다. 피겨여왕에게만 주어진 여유인 듯 보였다.

당시 언론은 느긋한 김연아와 다급한 아사다 마오를 비교하는 기사를 쏟아 냈다. 선수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얼음 위에서는 점프 성공률로, 얼음 밖에서는 심리 싸움으로 늘 경쟁구도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나흘이 흘렀다. 마지막 담금질을 마친 선수들이 마침내 얼음 위에 섰다. 소치올림픽 여자 피겨 싱글 쇼트 경기가 시작됐다. 

김연아는 메달 후보권 선수들이 포진한 5조(마지막조)에 비해 다소 이른 순번인 3조 5번째로 경기를 펼쳤다.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3Lz+3T) 콤비네이션 점프와 이어지는 트리플 플립(3F) 점프를 가볍게 뛰어내며 자신의 마지막 쇼트프로그램을 기분 좋게 시작했다. 이후 스핀과 스텝 시퀀스 등을 무리 없이 소화했고 마지막 점프인 더블 악셀(2A)까지 깔끔하게 뛰었다. 서정적이면서도 슬픔을 담고 있는 '어릿광대를 보내주오(Send in the Clowns)'에 맞춰 2분 50초간의 연기를 펼친 김연아는 경기가 끝나자 긴장했던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며 얼음 위를 빠져 나왔다.

올리브 그린색 의상을 입고 연기를 펼친 김연아의 모습은 마치 나비 같았다. 가벼워 보였고 얼음 위에서 더 자유로워 보였다. 실수 없이 연기를 끝냈고 선수도 지켜보는 국민들도 고득점을 예상했다. 4년 전, '제임스 본드 메들리(James Bond Medley)'를 연기해 쇼트프로그램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던 밴쿠버올림픽이 자연스레 연상됐다. 하지만 4년 전과는 달리 기대했던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선수와 코치의 얼굴은 후련해 보였지만 밝지 않았다. 상황을 중계하던 해설위원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움직이지 않던 다리, 자신만을 믿고 경기

키스앤크라이존을 나선 김연아에게 현지 취재단이 소감을 물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웜업(준비운동) 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어요. 긴장을 많이 해서 시합 직전까지도 점프를 제대로 뛰지 못했어요. 점프에 대한 자신감이 하나도 없었는데 '연습했던 거랑 뭐가 다르겠어, 믿고 하자'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마무리를 잘 지은 것 같습니다"

어디서든 당당하고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던 그도 자신의 마지막 쇼트 무대 앞에서는 23살 여자 선수에 불과했다. 자신이 컨트롤조차 할 수 없는 긴장감을 안고 얼음 위에 서야 했다. 그간의 연습량 그리고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김연아가 홀로 자신과의 싸움을 감당하고 있을 때 국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는 아사다 마오, 율리아 리프니츠카야 등 도전자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많은 국민들이 김연아의 경기를 '선수의 마지막 무대'로 감상하고 즐기기 보다는 경쟁 상대를 이겨주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김연아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지난 1일 방송된 KBS 특집 다큐멘터리 <김연아, 챔피언>에서 그는 "제가 당연히 금메달을 딸 것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 같아서 그런 것들이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랑 너무 다르다'라는 생각을 좀 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금메달을 따지 않더라도 저는 만족스럽고 후회 없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 자신만 생각하고 제가 목표로 한 것만 열심히 해서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중점을 둬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생겼다가 곧 사라지는 '이상한' 라이벌 

주니어 때부터 시작된 아사다 마오와의 라이벌 구도가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고, 그의 마지막 은퇴 무대인 소치올림픽에서는 라이벌 목록에 율리아 리프니츠카야도 추가됐다. 열흘 전만 해도 율리아의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었지만, 현재 율리아는 가장 짧은 시간에 높은 인지도를 쌓은 외국인 중 한사람이 됐고, 그와 관련된 소식은 온라인상에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있다. 

그리고 쇼트프로그램을 마친 현재, 예상했던 라이벌 아사다와 율리아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언론들은 김연아에 이어 2, 3위를 차지한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러시아)와 카롤리나 코스트너(이탈리아)를 새롭게 끌어들여 비교하고 있다. 의외의 복병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김연아는 2006년 11월, ISU(국제빙상연맹) 그랑프리 시리즈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시니어 선수로 데뷔했다. 이후 두 번의 국내 대회를 포함해 총 24번의 대회에 출전했다. 24번의 경쟁과 비교 그리고 24번의 긴장감과 부담감. 김연아는 주어진 모든 것을 감당하고 이겨냈다. 이를 견뎌낸 보상은 짜릿했다.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내 입상. 피겨 100년 역사상 김연아를 제외한 그 누구도 얻지 못한 타이틀이었다. 

25번 째 대회, '1등' 아닌 '김연아'에 집중

2014 소치동계올림픽이 시작됐다. 김연아 선수의 25번째 대회이자 은퇴 경기다. 2006-2007시즌, ISU 그랑프리 시리즈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쇼트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El Tango de Roxanne)'를 준비한 김연아는 당시 1조 1번으로 시니어 무대에 입성했다. 그리고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2013-2014시즌이자 그의 마지막 시즌, 소치올림픽 프리스케이팅만을 남겨놓은 김연아는 내일 새벽 3시 46분, 출전 선수 중 가장 마지막 순서로 얼음 위에 오른다. 프로그램 곡은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inino)'. 강렬한 눈빛과 카리스마, 16살 소녀답지 않은 표현력과 기술로 피겨계에 깜짝 등장했던 어린 소녀가 이제 이별을 말하려 한다. 

그의 관심사는 올림픽 2연패도, 라이벌 구도도 아니다. 오직 아름다운 마무리를 원할 뿐이다. 지난 24번의 대회에서 '1등' '경쟁'만을 강조해왔던 우리. 마지막인 만큼 이를 떨쳐내고 '선수 김연아'에 집중하는 건 어떨까? 

피겨여왕 김연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밤이다. 


by heyuna 2014. 2. 21. 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