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희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실격당했다. 막내의 은빛 메달에도 불구하고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은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15일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들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대회 8일차, 이상화의 금메달(스피드스케이팅 500m)과 박승희가 따낸 감동의 동메달(쇼트트랙 500m)로 종합 순위 16위에 랭크한 한국은 '동계 효도 종목'인 쇼트트랙에서 메달 수집에 나설 계획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1500m 준준결승에 출전한 든든한 막내 심석희와 대표팀 맏언니 조해리가 가벼운 몸으로 얼음을 지쳤고 각 조 1위로 준결승에 올랐다. 급성위염에도 불구하고 준준결승 경기를 마친 김아랑은 준결승 진출이 확정되자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음에도 최선을 다한 20살 소녀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경기를 시청하던 국민들이 힘을 불어 넣었다. 투혼이 시작된 것이라 믿었다.

동생을 위한 레이스, 결과는 실격

오후 8시 24분(한국시각), 여자 1500m 준결승 경기가 시작됐다. 몸이 좋지 않은 김아랑은 일찌감치 선두에 자리를 잡았고 체력이 좋은 조해리가 그 뒤를 바짝 붙었다. 중위권 선수들이 치고 올라올 때마다 조해리가 막아냈다. 덕분에 김아랑은 힘 조절을 하며 스케이팅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 내내 중위권 선수들을 방어하던 조해리는 결국 결승선을 두 바퀴 남긴 상황에서 3위로 밀려났고, 그 사이 뒤에서 힘을 아끼던 중국의 리 지안루가 선두로 올라섰다. 김아랑은 스피드를 유지하며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2위를 차지한 김아랑은 결승전 진출에 성공했고 자리싸움 도중 미국 애밀리 스캇을 손으로 밀친 조해리에게는 실격이 선언됐다. 무릎 부상을 당한 박승희를 대신해 1500m에 출전하게 된 조해리는 이날 유난히 몸이 가볍고 힘이 넘쳐 보였다. 동생 김아랑을 충분히 역전할 수 있음에도 힘을 아끼며 스케이팅 하는 듯 보일 정도였다. 급성위염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동생은 언니의 보호를 받으며 결승전에 진출했고, 동생을 위한 레이스를 펼친 맏언니는 실격으로 개인전을 마무리했다.

19분 뒤 남자 1000m 준결승 경기가 시작됐다. 신다운과 이한빈이 한 조에서 경기를 펼쳤는데, 이한빈이 네덜란드 싱키 크네흐트와 몸싸움을 벌이다 트랙에서 밀려났고 그대로 경기를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넘어지지 않았음에도 남은 레이스에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이틀 전, 500m 결승전에 출전한 자신의 여자친구 박승희가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레이스를 마쳐 큰 감동을 안긴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8시 24분-8시 43분-9시 12분-9시 25분

또다시 19분이 지났다. 여자 1500m 결승전이 열렸고 이 경기에서 또 한 명의 한국 선수가 실격 당했다. 김아랑이었다. 1500m 세계랭킹 1위인 심석희가 여유로운 레이스를 펼치며 선두에서 경기를 이끌어간 반면, 중위권 싸움을 하던 김아랑은 경기 중반 미국 애밀리 스캇과 자리 다툼을 하던 도중 넘어졌고, 실격 처리 됐다. 1시간 사이에 조해리-이한빈-김아랑 총 세 명의 한국 선수가 실격을 당한 것이다.

악몽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빅토르 안(안현수)과 함께 남자 1000m 결승에 오른 신다운이 남아있었다. 홈 관중의 압도적인 응원을 받고 스타트라인에 선 빅토르 안은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빅토르 안은 평소 뒤쪽에서 경기를 지켜보다가 막판에 스퍼트를 올려 선두로 치고 나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러시아 동료 선수와 함께 초반부터 선두에 자리를 잡았다. 1000m내내 경기를 이끌어갔다. 동료와 1위, 2위 자리를 번갈아 타며 체력도 유지했다. 신다운과 네덜란드 싱키 크네흐트가 선두 자리를 차지하려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결승선을 앞둔 마지막 코너, 1위와 2위를 확정 지은 러시아 선수들 뒤로 마지막 메달을 위한 신다운과 싱키 크네흐트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평소 과감한 플레이를 선보이는 신다운이 무리하게 인코스를 파고들어 크네흐트와 몸을 부딪혔고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잃었다. 결국 4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신다운은 비디오판독 결과 실격 판정을 받았다.

은메달을 딴 심석희를 제외하고 이날 경기에 출전한 한국 선수 네 명이 실격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중국, 미국 선수들의 '더티 플레이'에 피해를 받던 한국이 이젠 무리한 끼어들기와 거친 플레이로 가해자가 된 것이다.

실력만큼 '멘탈'관리도 필요한 쇼트트랙 대표

김동성-안현수-이정수 등 엘리트 선수들이 혼자서 올림픽 2연패 이상을 달성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전설의 김동성은 은퇴했고 천재 안현수는 러시아의 국가대표다. 4년 전, '짬짜미' 의혹을 폭로했던 이정수는 선수 자격 정지라는 중계를 받은 이후 전성기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영국, 카자흐스탄 쇼트트랙 대표팀의 코치는 한국인다. 한국 특유의 코칭법이 세계 곳곳에 전파되고 있고 그만큼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 됐다. 이러한 흐름을 인식하고 있는 만큼, 국민들 또한 '무조건 금메달'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지더라도 멋있게 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다.

만회할 기회는 남아있다. 18일 여자 1000m와 남자 500m, 여자 3000m 계주 결승 A가 열리고 22일 남자 5000m 계주 결승 B 경기가 예정되어있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올림픽에서 메달권이 아님을 알면서도 끝까지 역주를 펼쳐 '금메달 그 이상'이 무엇인지 보여준 이규혁 선수처럼 메달, 순위와 관계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박수 받을 수 있는 쇼트트랙 선수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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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una 2014. 2. 16. 1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