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빙판 영웅 김동성, 인생 2막을 열다
[TV리뷰] tvN <백지연의 피플 INSIDE> ‘김동성-송종국’ 편
12.07.25 15:32ㅣ최종 업데이트 12.07.25 15:32ㅣ정혜정(hey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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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오노 사건'으로 노메달, 3주 뒤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전관왕으로 명예회복. 이후 정상에서 은퇴. 한국 쇼트트랙의 영웅 김동성 스케이트 코치가 tvN <백지연의 피플 INSIDE>에 출연해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제 2의 인생에 들어선 소감을 털어놓았다. 

김동성은 8살 때 처음 스케이트를 탔다. 스케이트장에서 훈련하는 선수들을 보고 막연히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운동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성적이 잘 나오지 않자 아버지는 다른 운동을 권했다. 그러나 스케이트가 너무 좋았던 그는 차마 스케이트화를 벗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설득하고 꾸준히 훈련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주니어 대표로 뛰던 김동성은 선발전을 거치지 않고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한국 대표로 첫 출전한 1996 하얼빈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주목 받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김동성은 군 면제 걱정에서 자유로워졌고 이후 훈련에만 몰두했다. 

"아침, 점심, 저녁 내내 스케이트를 탔죠. 중고등학교 때 사춘기는 없었어요. 제가 좋아하던 걸 하다 보니 사춘기는 없었어요."

  
▲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편파판정으로 안톤 오노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김동성 선수.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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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3때 출전한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1000m 금메달과 남자 계주 은메달을 차지한 김동성은 올림픽 2연패를 꿈꾸며 다시 훈련에 몰입했다. 4년 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1500m에서 안톤 오노를 따돌리고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으나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과 편파판정으로 실격 처리 돼 노메달에 그쳐야 했다. 선수 인생에서 경험한 최악의 사건이라는 김동성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불운의 스타, 분노의 질주로 정상에 오르다

"경기 끝나고 너무 분해서 울다가 기절했어요. 눈 떠보니 다음 날이었고 제가 산소호흡기를 끼고 링거를 맞고 있더라고요.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고 몸과 정신까지 힘들었던 상황이었어요. 오노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게 다 풀어질 것 같은데 그 말을 안 하더라고요" 

사과하지 않은 오노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상처는 아물어 갔다. 그러다 2010년, 코치 신분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동성은 오하이오주의 한 아이스링크에서 자서전 투어를 하고 있던 오노를 만났다.

"오노가 먼저 와서 끌어안더라고요. 그리고 카메라를 보고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과 함께 저와 오노가 화해했다는 기사들이 막 떴죠. 이후 오노가 자서전을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읽어봤어요. 그런데 이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네가 최고의 선수고, 베스트 레이서다 (You're number one, You are the best)'.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거든요. 다시 분노가 불타오르면서 '저 녀석이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2010년 자서전을 발간한 오노. 사실과 다른 내용이 들어가 논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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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사건으로 김동성에게는 비운의 빙상스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김동성은 "비운은 아닌 것 같아요. 메달이란 메달, 기록이란 기록은 다 달성 했거든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동성은 2002 올림픽이 열리고 3주 뒤에 개최된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서, 올림픽 2연패를 하지 못한 아쉬움을 날려버렸다. 1992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전관왕을 차지한 김기훈(전 국가대표 감독) 이후 10년 만에 세계선수권 6관왕을 차지한 것이다. 

"오노 사건 이후 제 몸이 다 망가졌었어요. 근육도, 정신도요. 3주 만에 세계선수권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죠. 시간이 촉박했거든요. 그런데 당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는데도 국민들이 격려 해주신 점이 많이 힘이 됐어요. 오히려 메달 딴 선수만큼 제게 대우를 해주셨어요.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타도 오노'를 외치며 운동했죠."

1500m에 출전한 김동성은 경기 시작 두 바퀴째 다른 선수들과 반 바퀴 이상 거리를 벌렸다. 이후 스퍼트를 올리며 혼자 내달린 김동성은 2위 그룹을 한 바퀴 이상 추월했고 일찌감치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지금도 김동성의 '분노의 질주' 동영상은 포털사이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비운의 스타로 남을 뻔 했던 김동성은 세계선수권 전관왕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고 정상에서 은퇴했다. 

그는 선수생활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아버지가 오셨어요. 그런데 첫째 날 금메달 두 개 따는 모습을 보고 경기장 2층 스탠드에서 내려오시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신 거예요. 더 마음이 아팠던 점은 아버지가 쓰러졌는데도 다음 날에도 시합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어요. 시합에 뛰지 않으면 국가 대표에 발탁되지 못했거든요. 어머니가 '아버지도 네가 국가대표가 돼서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고 위로해주셨는데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시합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힘들었어요." 

1•20대 선수생활 끝, 30대 또 다른 인생

힘들었던 선수 생활을 끝내고 2005년 은퇴한 김동성은 결혼해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위한 어학 연수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메달리스트들이 모여서 본 영어테스트에서 운 좋게 합격해 미국으로 떠나게 됐죠. 1년 기간으로 갔는데 생활하다 보니 정착하게 됐고, 코치직 권유를 받고 미국에서 6년 동안 살았어요."

미국 매릴랜드와 버지니아주 스케이팅 클럽에서 학생들을 지도해오던 김동성은 작년 2월 제자들의 학부모로부터 폭행 혐의로 고소 당했고, 지난 5월 미국빙상연맹은 김동성의 코치 자격을 박탈시켰다. 폭행 논란에 김동성은 "없는 말을 지어내 말도 안 되는 코치로 매도하고 있다"고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저한테 어떤 학부모가 그러더라고요. '한국에서 선생님은 유명한 메달리스트인데, 지도하고 있는 선수들을 다시 클럽으로 보내준다면 아무 일 없이 깨끗하게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선수들을 데리고 계속 코칭을 한다면 선생님 명예에 큰 타격이 있을 겁니다'. 정말 무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을 성심성의껏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부모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고, 미국에서 코치를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한국 빙상계의 파벌 논란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저희 때는 파벌이라는 게 없었어요. 지금 파벌이라는 것은 개인 지도하는 코치선생님들이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국대로 뽑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 같아요. 만약 제 선수가 다섯 명이라면 이 선수들끼리 작전을 세워서 우리 팀 선수가 레이스에서 이기게끔 하는 거죠. (쇼트트랙은 개인 운동인데) 팀플레이를 하는 거죠. 그런데 만약 내 자식이 혜택을 못 받았다면 그 부모가 나와서 '파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 국제심판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김동성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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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한국 쇼트트랙 영웅이 된 김동성. 하지만 그의 나이 이제 33살이다. 남들보다 빨리 1막을 내린 김동성은 현재 미국에서 돌아와 스케이트 코치와 방송활동을 겸하고 있다. 그는 '국제심판'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2막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 것을 예고했다. 

"보통 인생은 20대 후반에서 30대쯤 시작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린 나이에 메달을 땄고, 이제 30대를 살아가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못 배운 것들이 많더라고요. 우선 인간관계와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배워야 할 듯 해요. 저희(운동선수)는 자기한테 잘해주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운동선수들이 사기도 많이 당하고요. 이제부터 인생을 배워야죠."

by heyuna 2012. 7. 2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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