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빙판 영웅 김동성, 인생 2막을 열다
[TV리뷰] tvN <백지연의 피플 INSIDE> ‘김동성-송종국’ 편
12.07.25 15:32ㅣ최종 업데이트 12.07.25 15:32ㅣ정혜정(heyuna)
태그김동성백지연의 피플 INSIDE쇼트트랙 
2002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오노 사건'으로 노메달, 3주 뒤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전관왕으로 명예회복. 이후 정상에서 은퇴. 한국 쇼트트랙의 영웅 김동성 스케이트 코치가 tvN <백지연의 피플 INSIDE>에 출연해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제 2의 인생에 들어선 소감을 털어놓았다. 

김동성은 8살 때 처음 스케이트를 탔다. 스케이트장에서 훈련하는 선수들을 보고 막연히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운동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성적이 잘 나오지 않자 아버지는 다른 운동을 권했다. 그러나 스케이트가 너무 좋았던 그는 차마 스케이트화를 벗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설득하고 꾸준히 훈련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주니어 대표로 뛰던 김동성은 선발전을 거치지 않고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한국 대표로 첫 출전한 1996 하얼빈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주목 받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김동성은 군 면제 걱정에서 자유로워졌고 이후 훈련에만 몰두했다. 

"아침, 점심, 저녁 내내 스케이트를 탔죠. 중고등학교 때 사춘기는 없었어요. 제가 좋아하던 걸 하다 보니 사춘기는 없었어요."

  
▲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편파판정으로 안톤 오노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김동성 선수.
ⓒ tvN
태그김동성


고 3때 출전한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1000m 금메달과 남자 계주 은메달을 차지한 김동성은 올림픽 2연패를 꿈꾸며 다시 훈련에 몰입했다. 4년 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1500m에서 안톤 오노를 따돌리고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으나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과 편파판정으로 실격 처리 돼 노메달에 그쳐야 했다. 선수 인생에서 경험한 최악의 사건이라는 김동성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불운의 스타, 분노의 질주로 정상에 오르다

"경기 끝나고 너무 분해서 울다가 기절했어요. 눈 떠보니 다음 날이었고 제가 산소호흡기를 끼고 링거를 맞고 있더라고요.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고 몸과 정신까지 힘들었던 상황이었어요. 오노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게 다 풀어질 것 같은데 그 말을 안 하더라고요" 

사과하지 않은 오노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상처는 아물어 갔다. 그러다 2010년, 코치 신분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동성은 오하이오주의 한 아이스링크에서 자서전 투어를 하고 있던 오노를 만났다.

"오노가 먼저 와서 끌어안더라고요. 그리고 카메라를 보고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과 함께 저와 오노가 화해했다는 기사들이 막 떴죠. 이후 오노가 자서전을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읽어봤어요. 그런데 이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네가 최고의 선수고, 베스트 레이서다 (You're number one, You are the best)'.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거든요. 다시 분노가 불타오르면서 '저 녀석이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2010년 자서전을 발간한 오노. 사실과 다른 내용이 들어가 논란이 됐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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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사건으로 김동성에게는 비운의 빙상스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김동성은 "비운은 아닌 것 같아요. 메달이란 메달, 기록이란 기록은 다 달성 했거든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동성은 2002 올림픽이 열리고 3주 뒤에 개최된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서, 올림픽 2연패를 하지 못한 아쉬움을 날려버렸다. 1992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전관왕을 차지한 김기훈(전 국가대표 감독) 이후 10년 만에 세계선수권 6관왕을 차지한 것이다. 

"오노 사건 이후 제 몸이 다 망가졌었어요. 근육도, 정신도요. 3주 만에 세계선수권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죠. 시간이 촉박했거든요. 그런데 당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는데도 국민들이 격려 해주신 점이 많이 힘이 됐어요. 오히려 메달 딴 선수만큼 제게 대우를 해주셨어요.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타도 오노'를 외치며 운동했죠."

1500m에 출전한 김동성은 경기 시작 두 바퀴째 다른 선수들과 반 바퀴 이상 거리를 벌렸다. 이후 스퍼트를 올리며 혼자 내달린 김동성은 2위 그룹을 한 바퀴 이상 추월했고 일찌감치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지금도 김동성의 '분노의 질주' 동영상은 포털사이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비운의 스타로 남을 뻔 했던 김동성은 세계선수권 전관왕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고 정상에서 은퇴했다. 

그는 선수생활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아버지가 오셨어요. 그런데 첫째 날 금메달 두 개 따는 모습을 보고 경기장 2층 스탠드에서 내려오시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신 거예요. 더 마음이 아팠던 점은 아버지가 쓰러졌는데도 다음 날에도 시합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어요. 시합에 뛰지 않으면 국가 대표에 발탁되지 못했거든요. 어머니가 '아버지도 네가 국가대표가 돼서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고 위로해주셨는데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시합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힘들었어요." 

1•20대 선수생활 끝, 30대 또 다른 인생

힘들었던 선수 생활을 끝내고 2005년 은퇴한 김동성은 결혼해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위한 어학 연수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메달리스트들이 모여서 본 영어테스트에서 운 좋게 합격해 미국으로 떠나게 됐죠. 1년 기간으로 갔는데 생활하다 보니 정착하게 됐고, 코치직 권유를 받고 미국에서 6년 동안 살았어요."

미국 매릴랜드와 버지니아주 스케이팅 클럽에서 학생들을 지도해오던 김동성은 작년 2월 제자들의 학부모로부터 폭행 혐의로 고소 당했고, 지난 5월 미국빙상연맹은 김동성의 코치 자격을 박탈시켰다. 폭행 논란에 김동성은 "없는 말을 지어내 말도 안 되는 코치로 매도하고 있다"고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저한테 어떤 학부모가 그러더라고요. '한국에서 선생님은 유명한 메달리스트인데, 지도하고 있는 선수들을 다시 클럽으로 보내준다면 아무 일 없이 깨끗하게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선수들을 데리고 계속 코칭을 한다면 선생님 명예에 큰 타격이 있을 겁니다'. 정말 무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을 성심성의껏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부모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고, 미국에서 코치를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한국 빙상계의 파벌 논란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저희 때는 파벌이라는 게 없었어요. 지금 파벌이라는 것은 개인 지도하는 코치선생님들이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국대로 뽑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 같아요. 만약 제 선수가 다섯 명이라면 이 선수들끼리 작전을 세워서 우리 팀 선수가 레이스에서 이기게끔 하는 거죠. (쇼트트랙은 개인 운동인데) 팀플레이를 하는 거죠. 그런데 만약 내 자식이 혜택을 못 받았다면 그 부모가 나와서 '파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 국제심판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김동성 코치.
ⓒ tvN
태그김동성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한국 쇼트트랙 영웅이 된 김동성. 하지만 그의 나이 이제 33살이다. 남들보다 빨리 1막을 내린 김동성은 현재 미국에서 돌아와 스케이트 코치와 방송활동을 겸하고 있다. 그는 '국제심판'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2막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 것을 예고했다. 

"보통 인생은 20대 후반에서 30대쯤 시작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린 나이에 메달을 땄고, 이제 30대를 살아가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못 배운 것들이 많더라고요. 우선 인간관계와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배워야 할 듯 해요. 저희(운동선수)는 자기한테 잘해주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운동선수들이 사기도 많이 당하고요. 이제부터 인생을 배워야죠."

by heyuna 2012. 7. 25. 16:54

[TV리뷰]박태환, 반란을 위한 준비는 끝났다
<SBS스페셜>-'승부사 박태환' 편...런던올림픽 '영웅의 귀환 프로젝트' 기대한다
12.07.24 14:58ㅣ최종 업데이트 12.07.24 14:59ㅣ정혜정(heyuna)
태그박태환SBS스페셜런던올림픽 
"중학교 3학년, 국가대표로 발탁됐을 때 막 기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올림픽을 앞두고 발탁됐기 때문에 그만큼의 긴장감이 있었거든요."

2004년, 만 14살의 나이에 최연소 수영 국가대표로 발탁된 박태환은 한국 대표로 출전한 첫 올림픽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실력을 겨뤄보기도 전에 부정 출발로 실격하고 만다.

  
▲ 하루에 7시간 씩 물속 훈련을 하는 박태환 선수.
ⓒ SBS
태그박태환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로 뽑힌 꼬마 박태환은 경험 부족으로 준비 신호를 출발 신호로 착각해 홀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킥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했던 그 꼬마가 3년 뒤 다시 세계 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2007 멜버른세계선수권대회. 400m 자유형 부문에 출전한 박태환은 5번 레인에서 경기를 펼쳤다. 총성과 함께 '제때' 출발한 박태환은 300m까지 줄곧 5위에 머물렀다. 선두권에서 멀어진 박태환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결승선을 50m 앞둔 350m 지점을 4위로 턴 한 박태환. 박태환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50m 구간에서 스퍼트를 끌어올린 박태환은 앞서 있던 선수 한두 명을 따라잡더니 결국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었다. 부정 출발로 실격한 꼬마 박태환이 대한민국 수영 영웅이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즐거워했던 것 같아요. 남들이 봤을 때 어떻게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내가 결승전에서 이런 세계적인 스타와 레이스 한다는 자체가 굉장히 즐겁고 뜻 깊은 일 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22일 SBS는 2004 아테네올림픽 실격,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 로마선수권 예선탈락,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등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한국의 수영 영웅 박태환의 2012 런던올림픽 준비과정을 담은 'SBS스페셜-승부사 박태환' 편을 방송했다. 

  
▲ 2012 런던올림픽, 박태환의 목표는 세계신기록 경신이다.
ⓒ SBS
태그박태환

박태환의 두 번째 올림픽인 2008 베이징올림픽은 4년 전과 달랐다. 400m 자유형 금메달, 200m 자유형 은메달. 아시아에서 놀던 박태환이 세계적인 물로 뛰어들었다. 박태환은 당시의 금메달은 놀라운 기억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저 자신도 좀 놀랐었어요. 파이널(결승)에 올라가는 것도 굉장히 힘든 일인데 거기서 금메달을 따게 돼서 굉장히 놀라웠던 거 같아요. 그 시기는 놀라웠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2004 아테네올림픽 이후 전국체전 우승은 물론이고 2006 도하아시안게임, 2007 FINA 경영월드컵 6차대회 200m•400m•1500m 석권에 이어 2008 베이징올림픽까지 승승장구 하던 박태환이 2009 로마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예선 탈락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박태환도 국민들도 깜짝 놀랐다. 언론에서는 '박태환 침몰'이라는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박태환은 처음 맞는 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한국 가기가 조금 두렵다고 해야 하나? 불편한 마음을 가졌던 건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아요. 한국 간다 그러면 집에 가는 건데… 계속 승승장구하는 모습만 보여지다가 한 번 이렇게 예선 탈락 해버리니까 그만큼 질타가 심하더라고요. 한 번에 롤러코스터처럼 쭉 내려가니까 제 마음도 상처 입는 게 더 심했어요. 한 번에 너무 많은 질타가 들이닥치니까 좀 버거워서 많이 힘들었어요."

  
▲ 한계를 넘는 훈련량. 근력 강화 운동 후 힘이 빠져 버린 박태환 선수.
ⓒ SBS
태그박태환
박태환 선수를 전담하는 권세정 팀장은 당시 박태환이 굉장히 혼돈스러워 했다고 전했다.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는데 나를 죄인 취급 하나, 은퇴할까?' 박태환 선수가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마이클 볼 코치를 선임한 후 코치와 첫 만남부터 박태환 선수가 굉장히 기분이 좋아 했어요. 동기가 생기고 수영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하면서. 그때부터 정신을 좀 차리게 됐죠."

마이클 볼 코치를 만난 박태환은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루 7시간씩 물속 훈련이 이어졌다. 박태환의 훈련이 끝나야 수영장의 하루 일정도 끝났다. 연습 벌레 박태환은 물속 훈련 전후에 수영 동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근력 강화 운동도 잊지 않았다. 힘든 과정을 묵묵히 이겨낸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박태환은 100m•200m•400m 자유형 3관왕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특히 200m 경기에서는 단 한번도 선두 자리를 내주지 않고 아시아 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호주 브리즈번 훈련장으로 돌아온 박태환은 잠영(물 속에서 하는 헤엄) 거리를 늘리고 돌핀킥(Dolphin Kick)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2012 런던올림픽을 대비해, 라이벌인 마이클 펠프스(193cm), 쑨양(198cm)과 10cm이상 차이가 나는 신장(박태환: 183cm)을 잠영과 돌핀킥으로 극복하기로 한 것이다. 
  
▲ 베이징올림픽때와 비교한 박태환 선수의 최근 모습.
ⓒ SBS
태그박태환

"박태환의 실제 수영 스피드는 마이클 펠프스나 라이언 록티만큼 잘합니다. 하지만 잠영이나 턴은 그렇지 못했죠. 그래서 저희는 아주 많이 노력했어요. 지난 2년 동안 잠영과 턴이 많이 향상 됐어요." (마이클 볼 코치)

박태환은 훈련을 통해 잠영 거리를 기존 6~7m에서 11~12m로 늘렸다. 돌핀킥을 강화하기 위한 근력 운동 또한 필수였다. 

"런던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돌핀킥 훈련에 많은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유연성이라든지 근력을 상호보완 하는 운동을 시킬 때 박태환 선수에게 '태환아, 이 운동은 돌핀킥에 굉장히 좋은 운동이고 아주 효율적일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하면 태환이가 굉장히 열심히 훈련을 합니다. " (권태현 체력 코치)

힘들다고 운동을 게을리 한 적은 없다.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량 덕분에 물살을 가르는 힘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가 됐다. 볼 코치와 훈련하기 전에는 돌핀킥을 한두 번 차던 박태환이 올림픽을 앞둔 지금 네 번까지 그 양을 늘렸다. 4년 전과 비교해 복근도 생겼다. 달라진 몸은 경기력에도 변화를 줬다. 

"저희 전담팀은 금메달을 100% 기대하죠. 이번 목표는 Super-X에요. 'Super eXcellent' 약자인데, 200m•400m 금메달에 400m 세계신기록이에요." (권세정 전담 팀장)

"제 생각에 쑨양의 실력이 급격하게 늘고 있는 것이 박태환 선수에게 큰 도전이 될 거예요. 박태환 선수도 자기가 이겨야 할 사람이 쑨양 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둘 사이에 아주 환상적인 시합이 될 것 같아요." (마이클 볼 코치)

  
▲ 2012 런던올림픽을 위한 준비는 끝났다.
ⓒ SBS
태그박태환

"아마 이번 올림픽 경기에서 1등과 8등 순위가 1~2초 내에서 정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국의 박태환이 반란을 일으킨 경기였다'라는 멋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저 자신한테도 그렇고요."  (박태환 수영 국가대표)

2012 런던올림픽 '영웅의 귀환 프로젝트'. 준비는 끝났다.

by heyuna 2012. 7. 24. 16:30

임권택 감독 “내가 만든 영화 제목, 기억 안 해요”
[TV리뷰] <백지연의 피플 INSIDE>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 편
12.07.24 15:26ㅣ최종 업데이트 12.07.24 15:26ㅣ정혜정(heyuna)
태그임권택피플인사이드 


1961년 첫 메가폰을 잡은 이후 반백 년 동안 101편의 영화를 만든 성실한 감독.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 23일 tvN <백지연의 피플INSIDE>에 출연해 영화인의 삶을 이야기 했다. 

  
▲ 임권택 감독은 50년동안 101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 tvN
태그임권택

임 감독은 작년 3월 자신의 101번 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를 끝으로 잠시 메가폰을 놓고 동서대학교 영화예술대학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진행자 백지연 씨가 "그 학교 학생들은 참 복도 많다"고 말하자 임 감독은 "복이 많다고 생각해야 할텐데… 학생들이 이 프로그램을 봐야 합니다"라고 웃으며 답했다. 

임 감독은 교수로서의 생활 외에도 2014년 인천에서 열리 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총감독으로 선임된 후 프로그램에 우리 문화재를 담아내는 것에 대해 고민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소통과 정을 테마로 삼고 있어요. 배경에는 여기가 한국이라는 것을 격조 높게 심을 거고요. 잘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50년간 101편의 영화를 만든 거장 감독의 겸손한 답변이었다. 임 감독은 한국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한국 영화사의 기준이 되는 영화인이다. 

  
▲ 한국 영화의 역사, 임권택 감독이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했다.
ⓒ tvN
태그임권택

그는 1961년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의 흥행 성공으로 10년간 5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년에 다섯 편씩, 그가 찍는 것은 모두 영화였다. 그러기를 10년. 무작정 찍어내는 것에 회의가 들었을까. 10년이 지난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기존에 찍어왔던 허구 세계를 덮어버리자. 미국 영화 아류를 만들지 말고 삶이 진솔하게 드러나는 영화를 만들자.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 많이 유치하고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도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을 만들자." 

흥행감독으로 50편을 찍어낸 체질화된 관성의 때를 벗기기 위해 그는 1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고 말했다. 그가 새로운 다짐을 가지고 찍은 첫 영화는 김지미 주연의 <잡초>. 저질영화, 액션물을 찍던 감독이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찍겠다고 하자,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임 감독은 직접 제작에 나섰다. 결과는 흥행 실패. 그러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한국인의 정신을 담는 영화를 찍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내 영화 보면 열 받아요" 거장의 겸손 발언

'그 동안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느냐'는 질문에 임 감독은 의외의 답변을 내 놓았다. 

"제 영화를 잘 안 봐요. 보면 열 받는 장면과 만나게 되요. 내가 만든 모든 영화에 나를 화나게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 열 받는 장면 때문에 제 영화는 잘 안 봐요. 영화가 다 만들어졌을 때 한 번 보고 끝이죠. 한 번은 텔레비전에서 1960년대 저질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거예요.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언제 한번 본 것 같기도 했는데, 끝날 때 보니 감독에 제 이름이 있는 거예요."

첫 10년 간 만든 50 편의 작품이 부끄럽다던 임 감독은 "혹시 불이라도 나서 그 흔적을 지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며 깜짝 발언을 했다. 그렇다면 <서편제>, <취화선> 등 세계 영화제에서도 인정받은 작품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임권택 영화학교에서 강의할 때 그런 영화를 보여주고 흠을 찾는 수업을 해요. 자기 살 자기가 깎아 먹는 거죠(웃음). 어떤 작품을 내걸어도 흠 잡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거예요."

매 순간 완벽을 추구했지만 단 한 편도 완벽한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그의 고백. 임 감독은 그런 치열함으로 10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임 감독이 대작(大作)을 다작(多作)할 수 있었던 것에는 아내의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 촬영 중간 아내 채령 씨가 인터뷰에 합류했다.

  
▲ 임 감독이 아내와 함께 인터뷰 중이다.
ⓒ tvN
태그임권택

일년에 200일 이상을 밖에서 생활하는 남편. 평생 영화에만 몰두한 남편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평생 은행에 가보지 않았다"며 '폭탄' 발언을 했다. 이런 남편을 위해 그는 카드를 만들어 주고 현금인출기 사용법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아마 현금인출기를 7~8년 전에 처음 사용했을 거예요. 카드를 만들어줬더니 한 일주일 동안 하루에 20~30만원씩 날마다 뽑는 거예요. 신기했나 봐요. 누르면 돈이 나오니까. (웃음)"

"내가 돈을 인출했는데 집에서 다 알고 있더라고요"라며 소년처럼 웃는 임 감독은 집안 걱정이 영화 일에 영향을 끼친 적은 없었다며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권현상)에 대해 아버지로서의 안타까움을 전했다. 

"자식이 영화인으로 사는 것을 별로 환영하지는 않아요. 평생을 영화인으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엄청난 인내와 노력이 수반되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쉽지 않은 길을 50년 간 걸어온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 감독. 그는 영화 촬영을 하면 현장에 가장 먼저 나와 있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오늘 찍어야 할 것들 생각하고, 거기에 깊이 빠져 있어야 해요. 열심히 일 하고 있는 스태프들에게 감독도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줬을 때 서로 믿음도 생길 것이라 생각하고요."

아직도 담아내고 싶은 한국 이야기들이 많다는 일흔 여섯 살의 노장 감독은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더 많이 알리기 위해 현장에서 뛰겠다고 말했다.

"아직도 (담아내야 할 곳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유명한 곳은 거의 다 돌아 다녔는데… '아직 안 본 곳들을 더 돌아다녀야겠지'하는 생각을 갖고 있죠."

by heyuna 2012. 7. 24. 16:29

돌핀킥 마스터 박태환 '물장구 세레머니' 재연 준비 끝!
[TV리뷰] KBS 1TV 2012 런던올림픽 특집 '올림픽 사이언스'
12.07.23 15:13ㅣ최종 업데이트 12.07.23 15:37ㅣ정혜정(heyuna)
태그박태환런던올림픽 
런던올림픽을 닷새 앞둔 22일 밤 KBS 1TV는 '2012 런던올림픽 특집 '올림픽 사이언스-박태환, 양학선, 김연경'편(1부작)을 방송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선수들의 운동 능력을 과학적으로 입체 분석한 프로그램. 4년 전 국민남동생에서 복근을 장착하고 '국민 남자'로 거듭난 박태환 선수의 훈련 과정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 런던올림픽 200m,400m,1500m 자유형 부문에 출전하는 박태환 선수.
ⓒ KBS
태그박태환

박태환은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사상 최초로 수영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서양인들이 독식하던 수영에서 한국인 선수에게 메달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때는 박태환이 등장하기 전이었다. 박태환이 베이징올림픽에서 400m 금메달과 200m 은메달을 딴 이후, 수영은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하나 정도는 쉽게 따올 것이라 예상할 수 있는 종목이 되어버렸다. 예전의 레슬링, 양궁처럼 말이다. 

5명이 겨루는 초등학교 운동회 달리기 경주도 아무나 1등할 수 없는데 학교 대표, 시 대표도 아닌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참가하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다는 것은 보통의 노력과 끈기로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어 본 박태환은 얼마나 고된 훈련이 있어야 세계챔피언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 두 개(400m•200m), 세계신기록 경신을 목표로 4년 전보다 더 혹독한 훈련을 이겨냈다.

  
▲ 훈련을 통해 4년 전보다 더 강해진 박태환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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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올림픽에서도 굉장히 뜻 깊은 성적을 냈지만 이번에는 세계신기록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사실 요즘 훈련을 하면서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많이 느껴요. 세게 신기록이라는게…"

베이징올림픽 당시에도 그의 컨디션은 최고였고 몸 상태도 완벽에 가까웠다. 4년 동안 키가 훌쩍 자라거나 발 사이즈가 10mm, 20mm 크진 않았을 텐데 그는 어떻게 더 높은 목표를 잡을 수 있었을까. 돌핀킥과 잠영이 해결책이었다. 돌핀킥(Dolphin Kick)과 잠영(물 속에서 하는 헤엄) 능력을 키우는 훈련을 반복하자 박태환은 4년 전보다 더 강한 선수가 돼 있었다. 

돌고래의 수영법과 비슷하다고 붙여진 돌핀킥은 지느러미를 좌우가 아닌 상하로 흔들기 때문에 물속에서 무려 시속 55km의 속도(돌고래의 경우)를 낼 수 있다. 호주 국립 스포츠연구소 책임연구원인 브루스 메이슨 씨는 "물에 뛰어들어 출발할 때 돌핀킥을 유지하면서 15m를 갈 수 있다면 일찍 올라와 수면 가까이 헤엄칠 때보다 상당히 더 빠른 속도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돌핀킥의 속도는 일반킥보다 1.4배 가량 빠르다고 한다. 

2004 아테네올림픽 400m 자유형 부문 금메달리스트 이안 소프를 키워낸 마이클 볼 코치의 지도를 받고 있는 박태환은 처음 볼 코치에게 왔을 때 (잠영 시) 돌핀킥을 한두 번 밖에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네 번으로 늘었다고 한다.

박태환은 강력한 돌핀킥을 위해 복근을 강화시키는 훈련에 집중했다. 또 지구력이 요구되는 지근보다는 순간적인 파워를 낼 수 있는 속근이 발달할 수 있도록 훈련 방법을 수정했다. 강도 높은 근력 강화 훈련으로 박태환의 돌핀킥 능력이 눈에 띄게 향상됐고 잠영 깊이는 물론 발차기 횟수도 늘어났다.

같은 거리를 달리는 경우, 수영 선수는 육상 선수보다 4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만큼 물의 저항을 뚫고 나가는 것은 공기를 가르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수영은 물의 저항과의 싸움이다. 저항을 덜 받기 위해서는 물 속에서의 수영하는 시간, 즉 잠영 거리를 늘려야 했다. 그동안 낮고 짧은 잠영 능력은 박태환의 단점이었다. 박태환의 잠영 훈련이 시작됐다. 

"태환, 얕아. 너무 얕았어. 너무 오랫동안 수면 가까이에 있었어. 마이클 펠프스가 물 속에서 하는 것을 보면 수면에서 상당히 깊이 들어갔다가 아주 날카로운 각도로 다시 올라와." (마이클 볼 코치)

  
▲ 박태환과 마이클 펠프스 신체조건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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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펠프스의 잠영 능력은 2008 베이징올림픽 당시에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박태환과 펠프스의 잠영 능력을 비교해보면, 한번 잠영시 박태환은 돌핀킥을 4번, 펠프스는 7번까지 사용한다. 펠프스가 물 속에서 박태환보다 오랫동안 돌핀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다리뿐 아니라 몸 전체를 이용해 물살을 타며 유연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차이는 신체 조건이었다. 키와 양팔 길이가 박태환보다 10cm 더 긴 펠프스의 발길이는 무려 350mm로 박태환보다 60mm 더 길다. 박태환은 신체 조건의 열세를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스타트를 똑같이 뛰더라도 키가 15cm가 더 작다면 (수면 위로) 나오는 게 15cm 더 늦는 게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더 보강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키를 늘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스타트를 더 멀리 뛰거나 돌핀킥을 훈련해서 15cm를 더 커버할 수 있는, 그런 테크닉 쪽으로 기술을 더 연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박태환의 폐활량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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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영과 돌핀킥과 함께 일반인의 두 배가 넘는 폐활량 또한 박태환의 장점이다. 기록 분석에 따르면 박태환의 경기 결과와 폐활량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예선 탈락한 2009 로마 세계선수권 당시 박태환의 폐활량은 6700cc, 100m•200m•400m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딴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출전 때는 6820cc였다. 2012 런던올림픽을 앞둔 현재 박태환의 폐활량은 7200cc다.

"자유형 400m 시상대의 제일 높은 곳에서 정말 기쁘게 웃고 싶은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 그림도 그리고 있고요. 가끔 자기 전에 멍하니 누워서 많이 상상하게 되는 데 꼭 그럴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 2008 베이징올림픽 400m 자유형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박태환이 세레머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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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 기준 28일 오후 6시 47분, 박태환의 400m 자유형 예선 경기가 시작된다. 터치 패드를 찍고 물 속에서 나와 격한 환호성을 지르는 박태환의 세레머니를 구경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by heyuna 2012. 7. 23. 15:41

올림픽 D-7, 영국인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TV리뷰] EBS <다큐 10+> '런던 2012, 올림픽을 준비하는 사람들' 편
12.07.21 10:15ㅣ최종 업데이트 12.07.21 10:17ㅣ정혜정(heyuna)
태그런던올림픽영국다큐 10+올림픽 
2012 런던올림픽 개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결전의 땅 런던으로 속속 도착한 선수들은 컨디션 조절에 들어갔고 런던올림픽조직위원회도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다.
 
'70억 세계인, 지구촌 스포츠 축제'로 불리는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이번 올림픽을 세계 인구 48억 명이 텔레비전을 통해 시청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막에 앞서 EBS <다큐 10+>은 런던올림픽 특집 프로그램(3부작-19일, 25일, 26일 방송)을 제작했다. 19일 밤, 1부 '런던 2012, 올림픽을 준비하는 사람들' 편이 방송됐다.

  
▲ 런던올림픽 개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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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012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런던이 확정되자 영국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직위원회는 2012 런던올림픽을 스포츠축제를 넘어 거리를 좁히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문화 올림픽'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수많은 예술가와 엔지니어, 건축가 등이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해 동참했다. 영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뒷받침 됐다. 


런던올림픽의 자랑은 '도시 그 자체'라고 판단한 조직위원회는 런던의 왕립 공원 중 하나인 그리니치 파크(Greenwich Park)에서 승마 경기를, 하이드 파크(Hyde Park)에서 트라이애슬론(수영·사이클·마라톤) 경기를 펼치고, 양궁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크리켓 경기장인 로즈 크리켓 그라운드 (Lord's Cricket Ground)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 비치발리볼 경기가 펼쳐질 호스 가즈 퍼레이드(Horse Guards Parade).
ⓒ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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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년 여왕 친위대 훈련 장소로 만들어진 호스 가즈 퍼레이드(Horse Guards Parade)에서는 비치발리볼 경기가 열릴 예정이다. 건축가 제프 키스는 "처음부터 경기장으로 점 찍은 곳"이라며 "적당한 경기 종목을 선정하는 게 문제였지만, (합의를 통해) 비치발리볼을 선택했고 모두가 흥미를 보였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생일 행사가 펼쳐지는 곳에서 비키니를 입은 선수들이 경기를 펼치게 됐다. 전통을 존중하지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영국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쿨'한 경기장 선정이다. 

텅 빈 공장과 산업 폐기물이 가득했던 런던 동부 지역은 스포츠 도시로 거듭났다. 동부에서도 가장 낙후된 스트랫포드(Stratford)에 올림픽 스타디움과 올림픽 기념 조형물 '오빗 타워(Orbit Tower)'가 들어섰다.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은 이번 올림픽이 영국의 기술력을 세계에 알릴 기회라 생각했다. 엑스포처럼 랜드마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런던시는 건축가, 조각가, 토목 기술자 등을 모아놓고 "상징적 의미가 있는 탑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 올림픽 스타디움 옆에 세워진 런던 올림픽 랜드마크 오빗 타워(Orbit Tower).
ⓒ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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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빗 타워 개발팀은 유연하고 다양한 사고를 받아들이는 영국,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면서도 안정을 잃지 않는 21세기 영국을 보여주고 싶었다. 100m의 조형물은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다. 뒤틀리며 교차하는 구조로 설계된 오빗 타워는 불안하면서 안정적인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 

'고바이다 깨어나다' 프로젝트도 개막 당일 세계인의 시선을 집중시킬 히든카드 중 하나다. 전설 속 인물인 고바이다는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알몸으로 말을 탄 채마을을 돈 영주 부인이다. 고다이바 인형은 영국 최대 모형제작업체가 제작했다.
 
10m의 큰 키, 55개의 부분이 연결된 인형은 통제 시스템의 제어를 받는다. 인형은 자전거 수레에 실려 코벤트리 마을에서 런던으로 운반된 뒤 런던 시내에 도착하면 자전거에서 내려 혼자 걸을 예정이다. 프로젝트 참가자는 "인형이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영국인의 새 기술력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개막 전 인기 행사인 성화 봉송에 쓰는 성화봉 또한 주최측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 중 하나다. 이번 런던올림픽 봉송 주자는 축구선수 디디에 드로그바(코트디부아르), 힙합그룹 블랙아이드피스 리더 윌 아이 엠(미국), 차범근, 이승기 등을 포함해 총 8천 명에 이른다. 디자이너는 8천 개의 구멍을 뚫어 성화봉에 봉송주자를 담았다고 전했다. 

  
▲ 2012 런던올림픽 금메달.
ⓒ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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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메달이다. 올림픽에서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은 선수들에게, 시상대에 올라 메달을 받는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일이다. 선수 생활의 정점 같은 순간, 그런 이유로 메달은 견고하고 아름답게 제작되어야 한다.
 
런던올림픽 메달은 영국 남서부 지방 웨일스(Wales)에 위치한 영국 왕립 조폐국에서 상엄한 경계를 받으며 제작됐다. 제작자는 "구상대로 나온 결과물에 만족한다. 까다로운 작업이었지만 우린 해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시상식에서 메달만큼 중요한 것이 국가다. 런던 필하모니 관혁악단은 '비틀즈의 거리'로 유명한 애비 로드(Abbey Road)에서 참가국 203개국의 국가를 편곡하고 녹음했다. 국가를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녹음한 것을 각 나라로 보내 허락 받는 작업을 거쳤다. 허락 받지 못한 국가는 재편곡, 녹음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현재 독일, 에콰도르, 우간다 등 참가국의 절반 가량이 허락했고 개최국인 영국의 허락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 한국 기준 7월 28일 오전 5시, 2012 런던올림픽이 개막한다.
ⓒ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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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영국인은 올림픽을 재계약의 기회로 삼고 있다. 후손들이 뿌듯해 할 올림픽을 만들기 위해서 온 나라가 분주하다. 전 국민의 힘을 모아야만 성공적인 국제 대회 개최가 가능한 법. 준비를 마친 6천 만 영국인이 7월 28일, 2012 런던올림픽 개막만을 기다리고 있다.

by heyuna 2012. 7. 21. 14:22

멈추기 위해 달려야 했던, 황영조 감독 
[TV리뷰]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 '42.195km, 황영조 전설을 달리다' 편
12.07.19 17:20ㅣ최종 업데이트 12.07.19 17:20ㅣ정혜정(heyuna)
태그황영조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백지연 
1992년 8월 9일, 그 날은 새벽 5시에 일어나 훈련장으로 향하지 않아도 됐다. 결전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식을 앞두고 올림픽의 꽃, 마라톤 경기가 열렸다. 아프리카 선수들의 강세로 메달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달렸다. 

손기정 선수(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후 56년 만에 한국에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안겨준 황영조 감독이 런던 올림픽을 9일 앞둔 18일 tvN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 방송에서 올림픽 챔피언이 되기까지의 힘겨웠던 과정을 공개했다. 

  
▲ 황영조 선수가 힘들었던 선수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 tvn
태그황영조
"(올림픽은) 완주가 목표가 아닌 상대를 이겨야 하는 승부였어요. 20km를 통과하면서 앞으로 치고 나가니 다른 선수들이 따라 오지 못했죠, 여유 있게 나간 거였는데. 이후 35km 지점에서 일본 선수가 따라 붙었습니다. 내리막길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른 죽음의 코스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선수와 승부가 시작됐죠."

죽음의 레이스 앞에서 '금메달 양보심' 발동

황영조 감독은 모리시타 선수와 열 번 이상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면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도 힘이 들면 마음도 약해집니다. 솔직한 얘기로 양보심이 생기더라고요. 도저히 못 가겠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이기겠다 생각했는데, (죽음의 코스 들어서자) 도저히 안 되겠다. 먼저 가라, 할 정도로 마음이 약해졌어요. 그런데 (모리시타 선수가) 먼저 나가더라고요. 그 시점에서 놔주면 끝나거든요. 다시 이겨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렸죠."

은퇴할 때까지 일본 선수한테 진 적이 없다는 황 감독은 아프리카 선수와 승부를 벌였다면 당시 포기했을 지도 몰랐을 거라고 말했다.

"아프리카 선수들은 무표정이에요. 일반 사람들은 힘이 들면 동작도 커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지잖아요. 그런데 아프리카 선수들은 무표정으로 달리기 때문에 힘든 상황인지 아닌지 캐치를 못하죠. 저는 힘든데 이 선수는 멀쩡해 보이니까.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할 수 있는데… 일본 선수와는 서로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치고 받았죠. '내가 힘들면 너도 힘들겠지 너라고 안 힘들겠냐'는 생각으로 위안 삼으면서 계속 달린 거죠"

  
▲ 황영조 선수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해 2시간 13분 23초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 tvN
태그황영조

한 걸음 한 걸음을 숨 넘어가듯 죽을 각오로 내달려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다. 그리고 그는 맥없이 쓰러져버렸다. 세레머니를 하지도 못한 채 들것에 실려나갔다. 백지연이 '태극기를 들고 운동장을 달리지 못한 아쉬움이 없냐'고 묻자 "태극기를 들 힘을 남겨놓고 골인했다면 1등을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2시간 13분 23초를 사력을 다해 달렸다. 올림픽 직전 족저근막염(근막에 염증이 생겨 발뒤꿈치로 통증이 전해지는 증상)이 발병해 완벽하지 않은 컨디션으로 얻은 결과였다. 

'기적의 사나이' 황 감독이 금의환향하자 기자들은 '황영조 2연패'라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선수와 인터뷰도 하지 않은 채 4년 후에 열리는 애틀란타 올림픽에 출전하라고 등을 떠민 것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뛰어야 할 수밖에 없는, (다음 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는 분위기였어요. 발바닥을 수술하고 1년 쉰 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1994) 준비를 시작했죠."

그는 바르셀로나 올림픽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저에게 마라톤은 너무 가혹한 스포츠였어요. '언제 내 인생에서 달리지 않는 날이 올까' 늘 생각했죠. 매일 5시에 일어나서 훈련했어요. 아침에 눈 뜰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뜨는 순간 뛰어야 하니까. 저에게 마라톤은 즐기기에는 너무 가혹했어요. 92년 이거(바르셀로나 올림픽) 뛰고 끝낸다고 생각했죠."

훈련 당시, 사육 당하는 동물 같은 느낌이었다

황 감독은 선수로 훈련할 때 매일이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선수니까 경기에 모든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힘든 고통을 참아내면서 훈련했다. 

"제 훈련 일지를 보면, 훈련소를 '창살 없는 감옥'으로 표현했어요. 먹고, 자고, 뛰고. 사람이라기보다는 사육 당한다는 느낌, 동물 같은 느낌이었어요. 마라톤 선수로 성공하려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해요. 내가 동물화 되어 있을 때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고자 하는 것을 빨리 이루고 접는 게 목표가 돼 버렸어요. 이 힘든 훈련을 10년, 20년 하자고 생각을 못한 거죠."

  
▲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황영조 선수는 현재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이 돼 선수들을 지도 중이다.
ⓒ tvN
태그황영조

2000년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부를 지도하고 있는 황 감독은 선수들의 정신력이 많이 나약해졌다고 지적했다. 

"훈련 여건은 상당히 좋아졌는데 환경은 어려워진 것 같아요. 마라톤은 자신과 싸우는 운동이거든요. 그러면 선수들이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선수들은 인터넷과 전화기를 들고 삽니다. 자야 할 때, 자다가도 전화가 오니까요. 한국 마라톤이 다시 좋아지려면, 섬에다가 선수촌을 만들어서 외인구단처럼 훈련을 시켜야 해요. 오직 훈련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2012 런던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출전하는 선수 중 2시간 3분대를 기록하는 경쟁자들이 수두룩한데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2시간 11분, 14분대 기록을 가지고 올림픽에 참가한다. 황 감독은 "선수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 하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참가에 만족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요즘 선수들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잘 하려고 해요. 이것 저것 다 하면서 다른 것도 잘 하려고 하면 이룰 수가 없죠. 오직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그럴 때 되는 거죠. 하고 싶은 거, 관심 있는 거 다 하면 운동은 언제 하나요. 뛰는 시간만이 운동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 자기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운동으로 연결 시키는 것까지 훈련이죠. 그러니까 24시간이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지, 친구 만나고 놀다가 들어와서는 집중이 되겠습니까."

  
▲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 하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황영조 선수
ⓒ tvN
태그황영조
한국 마라톤 부흥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황 감독은 자신의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제가 지도하고 있는 우리 선수들이 저를 통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저를 통해서 자신의 꿈을 이뤄나갈 수 있는 그런 선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제 선수뿐 아니라 마라톤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건강해졌으면 하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by heyuna 2012. 7. 19. 18:00

'악동' 이천수 "고교 이후 축구 인생, 지우고 싶다"
[TV리뷰]이천수,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 재출연해 사과 반복
12.07.18 16:33ㅣ최종 업데이트 12.07.18 17:13ㅣ정혜정(heyuna)
태그이천수백지연박지성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TVN 


장맛비를 뚫고 모였다. 3만 명이 넘는 관중과 2002 한일 월드컵 4강 주역들, 현 K리그 선수들과 감독들이 궂은 날씨에도 경기장을 찾아 축제를 즐겼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2 월드컵 대표팀 초청, 하나은행 K리그 올스타전 2012>에 2002 한일 월드컵 10주년을 기념해 히딩크 감독을 포함 2002년 국가대표 선수들이 한 팀을 이뤄 2012 K리그 올스타팀과 경기를 펼쳤다.


  
▲ 지난 5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축제, '2002 월드컵 대표팀 초청, 하나은행 K리그 올스타전 2012'
ⓒ 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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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감독 이하 홍명보·황선홍·김남일·박지성 등 영웅들이 그라운드에 등장하자 관중들은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골이 터질 때마다 선수들은 다양한 세레머니를 선보여 팬들을 즐겁게 했다. 특히 박지성 선수는 10년 전 포르투갈 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뒤 히딩크 감독에게 안긴 세레머니를 재현해 보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모두가 즐겁고 유쾌했던 그 공간에 '악동' 이천수가 설 자리는 없었다. "2002년 선수들이 모이는 자리에 꼭 참석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천수는 2002년 국가대표 23명 가운데 유일하게 축제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라운드에 서지 못한 이천수가 백지연 앞에서 심경을 털어놓았다. 17일 tvN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는 '임의탈퇴 이천수, 이대로 잊혀지나' 편을 방송했다.

 

정리되지 않은 상황, 어두운 얼굴로 등장

 

이천수는 등장부터 심각한 표정이었다. 백지연이 인사말로 "멋을 많이 냈다, 원래 잘 차려 입고 다니냐"고 묻자 대뜸 "힘들 때 더 잘 입어야 한다고 부모님께서… (말씀하셔서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국내 축구 경기에 뛰지 못하는 현재 상황이 힘들다고 덧붙였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힘든 상황에 처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3년 만에 다시 출연한 이천수 선수가 진행자 백지연 씨의 질문을 듣고 있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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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전남 드래곤즈에서 뛰던 이천수는 6월 28일, 포항전 원정경기에 동행하라는 박항서 감독의 지시에 항의하다 코칭스태프와 언쟁을 벌였다. 이에 박 감독은 2군행 징계를 내렸으나 이천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팀을 무단이탈했다. 구단은 나흘 뒤인 7월 2일, 이천수를 임의탈퇴 시켰고 이천수는 13일 사우디아라비아 리그 <알나스르>로 이적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임금 체불 문제로 9개월 만에 팀을 떠난 이천수는 J리그로 눈을 돌렸다. 2011년 12월까지, 1년 6개월간 J리그에서 뛴 그는 J리그의 재계약 요청을 거절하고 K리그 복귀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올해 1월 6일, 전남 드래곤즈 홈페이지에 '전남 드래곤즈 구단과 전남 팬들께 드리는 사과문'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K리그 복귀를 희망하며 이천수가 3년 전 일에 대해 구단에 공식으로 사과한 것이다. 전남이 임의탈퇴선수 공시를 철회해야 K리그 복귀가 가능한 상황. 하지만 전남의 입장은 단호했다. 전남은 "임의탈퇴선수 공시를 철회할 의사가 없고, 이천수의 사과가 진정성이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구단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갈 데가 없으니까 사과를 해서 그걸 풀고, K리그에서 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구단 측에서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가슴 속에 뭔가 뭉쳐있는 느낌이었어요. 외국에서 잘 해도 기쁨이 별로 없고 K리그에 좋았던 생각만 들고…. 머릿속에는 K리그 복귀뿐입니다."
 
이천수는 사과를 받는 입장에서는 급하게 사과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며, 시기상조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문제가 된 '진정성'을 구단 측에 보여주기 위해 스승과 선배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자선 축구 경기에서 홍명보 감독님을 만나 조언을 얻었어요. '네가 잘못한 거니까 사과하고 (K리그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운재 형과도 최근에 통화했어요. 형이 전남 소속이거든요. 정해성 감독님(2002년 당시 대표팀 코치)께 좋은 이야기 좀 많이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는데 솔직히 어떤 방식으로 보여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이천수는 답답한 심경을 전했다.
 
3년 전에도 했던 말 "다 제 잘못이죠"

  
▲ 2009년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 3회 차에 출연한 이천수 선수가 부모님께 영상 편지를 보내고 있다.
ⓒ tvN
태그이천수
이천수의 사과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3년 전 <백지연의 피플 Inside>에 출연(2009.6.14일 방송)해 비슷한 이야기들로 분량을 채운 바 있다.
 
"주먹감자 사건(골을 오프사이드 선언한 심판을 향해 손으로 욕설한 사건)으로 출연했을 당시, 녹화 전에 '다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을 거냐, 그러면 저희가 이천수씨 편에서 인터뷰 해드릴게요'라고 말한 거 기억하시죠? 그때 눈물도 보이셨고 박항서 감독님께 영상 편지도 썼고,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얘기 하셨는데…" (백지연)
 
당시 방송에서 백지연은 '비난보다는 격려를 부탁한다'며 이천수를 믿고 옹호하는 발언도 했다. 그러나 방송이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천수가 팀을 배신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적한다'는 소식을 들은 백지연은 놀랐다고 말했다. 언론인으로서 본의 아니게 난처한 상황을 맞은 백지연. 이 말을 듣고 있는 이천수는 진행자 백지연의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손만 만지작거렸다. 백지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3년 전에 인터뷰에서도 지금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다시 반복된 건 뭘까요, 왜 그랬을까요?" (백지연)
 
"제 잘못이죠. 제가 한 것이고, 어떻게 됐든 경제적 문제도 제가 만든 거고요." (이천수)
 
  
▲ 1년 선배인 박지성 선수의 활약상을 묻는 질문에 답하는 이천수 선수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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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연은 이천수에게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질문도 이어갔다. 2002년 같은 '막내 라인'이었던 박지성과 이천수. 10년이 지난 지금, 둘은 많이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박지성 선수는 계속 탄탄대로를 걸어가는데 이천수 선수는 이유가 어찌됐든 굴곡이에요. 이천수 선수를 지지했던 팬들로선 정말 안타까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달라진 길, 어떤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백지연)

"어릴 적에 재능 있다, 잘한다, 천재다, 이런 말들 때문에 굉장히 거만해지고 나약해지지 않았나 (생각해요.) 지성이 형 같은 경우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더 (고개) 숙이고 노력했고, 저는 천재가 아님에도 그런 말에 휩쓸렸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천수)

이천수의 한숨 "이제부터는 한달 한달이 고통일텐데…"
 
32살인 이천수는 '축구선수로서 생명은 35살에 끝날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선수 생활, 'K리그 복귀 가능' 소식만을 기다릴 수 없다는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기다려서 정말 좋은 일이 생긴다면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런데 이제부터는 한달 한달이 굉장히 저한테 고통일 것이고, 지금 6개월 쉬었는데 1년을 더 쉬게 되면 나올 수 있는 기사의 내용은 2002년 월드컵 선배님들께서 많이 하는 은퇴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더 이상 저를 찾는 팀도 없을 것이고, K리그에서도 잊혀질 것이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제 입장에서는…."

이천수를 찾는 곳이 많지 않은 상황, 정말 운동을 해야겠다고 판단이 들었을 때는 모든 나라가 뛰고 싶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이천수. 하지만 그 곳이 K리그라면 더 좋다는 그.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주역 중 한 명인 그는 지금 어디에도 설 곳이 없다. 고등학교 이후 축구 인생을 모두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그에게 전남 구단이 관용을 베풀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줄까. 2002 한일 월드컵 10주년을 맞아 팬들과 국민들의 관심이 호의적인 이때, 이천수가 전남을 향해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by heyuna 2012. 7. 18. 19:35

거스 히딩크 "한국 올 때마다 따뜻한 목욕 하는 것 같다"
[TV리뷰] 12일 방송된 tvN < 백지연의 피플 INSIDE > 히딩크 감독
12.07.16 10:23ㅣ최종 업데이트 12.07.16 10:23ㅣ정혜정(heyuna)
태그히딩크안정환박지성백지연피플인사이드 
지난 3일 거스 히딩크 감독(66, 안지 마하치칼라)이 입국했다. 4일 오전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글로벌 명예 홍보대사 위촉식에 참석한 그는 오후에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으로 이동해 올스타전 기자회견과 'TEAM 2002' 공식훈련을 했다. < 2002 월드컵 대표팀 초청, 하나은행 K리그 올스타전 2012 > 경기를 앞둔 5일 오전, 히딩크 감독은 tvN <백지연의 피플 INSIDE>에 출연해 스페셜올림픽 홍보대사로서의 활동과 올스타전에 임하는 각오, 10년째 이어지는 한국 사랑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글로벌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된 거스 히딩크 감독.
ⓒ 정혜정
태그히딩크

히딩크 감독이 "어제 공식훈련에서 2002년 대표팀 멤버 대부분을 만났는데, 무척 흥분됐다"고 입을 열자 진행자 백지연은 2002년 당시 가장 기대가 컸던 선수가 누구였냐고 물었다.

"이름을 말하기가 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모든 선수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헌신적이었습니다.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선수들도요. 하지만 하나의 예는 들 수 있습니다. 안정환 선수. 2001년 우리가 처음 훈련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탈리아 AC 페루자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팀의 실력은 중간 정도로 메이저는 아니지요. 어쨌든 그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선수라,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월드컵에 나갈 정도의 경쟁력을 갖춘 선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이런 훈련이 익숙지 않은 그는 힘들었을 텐데도 그 혹독한 훈련을 다 해냈습니다."

어제 안정환을 만나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히딩크 감독은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서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살도 빠졌지만 조금씩 체력을 쌓아가기 시작했죠. 안정환은 이탈리아에서의 선수 생활로 약간의 자만심에 빠져있었지만 저는 그를 월드컵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도전하게 한 겁니다. 그가 이 도전을 받아들임으로써 월드컵에서 몇 번의 결정적인 골을 넣을 수 있었죠."

"모든 선수를 존경합니다. 그가 열정적이라면"

히딩크 감독은 2001년 1월 처음 훈련을 시작했을 당시 한국 선수들의 열정에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집중력도 높았고 시키는 것을 다 해내는 헌신적인 자세를 보고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키우기 시작했다. 

  
▲ ‘2002 월드컵 대표팀 초청, 하나은행 K리그 올스타전 2012’ 에서 2002 한일월드컵 포르투갈 전 당시 세레머니를 재현한 박지성 선수와 히딩크 감독.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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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박지성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처음 박지성을 봤을 때 그가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선수이기는 하나 엄청난 실력가는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그는 놀라운 의지력이 어떤 성공 사례를 만드는지 보여주는 좋은 케이스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죠."

숨은 보석 박지성을 발견한 히딩크 감독. 선수의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히딩크 감독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히딩크 감독은 "내 역할은 모든 선수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고 존경해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저는 모든 선수를 존경합니다. 그들이 열정적이라면요.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지만, 최고가 되고 싶다면 그 한계보다 조금 더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없애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5%, 10%, 15% 더 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각 선수의 한계와 능력을 파악해야 하고 이것을 한 팀으로 묶는 역할을 하죠."

선수 생활 15년, 감독은 30년 차

2002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 수장을 맡아 4천만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한 히딩크 감독. 이후 그는 호주·러시아·터키의 국가대표 감독,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첼시 FC(잉글랜드) 등 명문팀 감독으로 '히딩크 매직'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가 감독으로 명성을 쌓는 데에는 프로선수시절 체육교사로 활동한 것이 도움됐다. 1967년 21세 나이에 네덜란드 지역 프로팀 '데 그라프샤프(De Graafschap)'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한 히딩크 감독은 자신을 "엄청난 실력을 갖춘 선수는 아니었지만 괜찮은 선수"였다고 평가했다. 네덜란드 리그와 미국 리그에서 활동한 히딩크 감독은 많은 감독 아래서 경험을 쌓아나갔다. 그리고 22살 때부터 다이어리에 '감독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저는 프로선수이면서 체육교사였습니다. 불우한 가정의 청소년과 비행 청소년을 지도했는데 이 경험은 나중에 선수들에게 활용할만한 많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젊은 체육교사로서 예민한 성격을 가진 소년, 소녀들을 다루기가 정말 힘들었지만 이 경험은 나중에 코치로서의 큰 장점이 되었죠. 아이들을 다루는 것과 선수들을 다루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의 차이점이라면 선수들에게는 언제나 카메라가 따른다는 것뿐, 기본적인 역학은 다 똑같습니다."

축구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축구에 관심이 많았던 히딩크 감독은 21살에 프로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해 15년간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마흔 살에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에서 첫 감독을 시작한 히딩크 감독은 55세, 한국 국가대표 감독이 돼 대한민국 축구 역사를 다시 썼다. 성공한 감독, 히딩크. 그는 감독과 선수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하냐는 질문에 '선수'라고 답했다. 

"단순하게 직접 뛰는 것이 제게 더 기쁨을 줍니다. 가르치는 것은 선수로 뛰는 것을 대신하는 것뿐입니다. 결국에 선수들이 노는 것이죠. 아이들이 노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그게 바이올린이든 발레든 축구든 야구든, 무엇이든 노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장애인을 위한 꿈의 구장을 짓다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히딩크 감독. 그래서였을까.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 시각장애인이 마음 놓고 뛰놀 수 있는 공간, 히딩크 드림 필드(Hiddink Dream Field)를 짓기 시작했다. 

  
▲ 히딩크 감독은 한국에 시각장애인이 마음 놓고 뛰놀 수 있는 공간인 히딩크 드림필드(Hiddink Dream Field)를 짓고 있다.
ⓒ tvN
태그히딩크

"2002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 국민들로부터 큰 사랑과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이 사랑을 어떻게 갚을지 고민했죠. 그때 저의 연인인 엘리자베스가 '축구라는 아름다운 세계 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며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불우하고 불편한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우리가 공감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을 치른 도시들에 축구장을 설립해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림 필드는 시각장애인을 포함한 다른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와서 놀 수 있는 공간입니다. 놀아야죠. 아이들은 반드시 놀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눈이 불편해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2002년 월드컵 유치도시에 드림 필드 설립이 다 된 지금, 또 다른 드림 필드 설립요청이 들어오고 있어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2003년 출범한 히딩크 사회복지재단은 2008년 충주성심맹아원을 시작으로 포항·수원·전주·울산·광주·부산·대구·대전·목포·순천 순으로 히딩크 드림필드를 건립하고 있다. '드림 필드 10호'까지 개장했고 현재 전남 순천에 '드림 필드 11호'를 세우기 위해 추진하고 있다.
 
에너지가 넘치는 한 감독 생활 유지할 것

"한국에 올 때마다 따뜻한 목욕을 하는 것 같다"는 히딩크 감독. 4천만 국민에게 뜨거운 추억을 안겨준 태극전사들의 리더 히딩크 감독에게도 2002 한일 월드컵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는 듯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에는 1~4년 사이에 (한국과의) 관계가 시들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역사 속에서 희미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국 분들과 월드컵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아직도 흥분합니다."

  
▲ 트레이드마크인 어퍼컷 세레머니를 보여준 히딩크 감독
ⓒ tvN
태그히딩크

은퇴 여부를 묻는 백지연의 질문에 "아직 에너지가 남아있고 어린 선수들에게 늙고 지루한 할아버지로 안 보인다면 계속할 것"이라며 "언제나 사람들의 느낌을 읽으려고 한다. (선수들이) '저 못되고 짜증 나는 늙은이 또 왔네'라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면 은퇴는 안 하겠다.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어퍼컷 포즈를 요구하는 백지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즈를 취하며 "거요?"고 답한 히딩크 감독. 한 번 더 부탁하자 "나는 벌써 했습니다. 찍었나요? 카메라 감독님, 찍었나요?"라고 웃으며 다시 한 번 카메라를 향해 어퍼컷을 날렸다. 어퍼컷만큼이나 확실하고 유쾌했던 히딩크 감독의 토크쇼 출연, 히딩크 감독의 한국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알찬 시간으로 기억될 듯하다.

by heyuna 2012. 7. 16. 10:27

"스케이트 날 위에서 집중력 훈련했어요"
[인터뷰]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쇼트트랙 현인아 선수 어머니
12.07.08 15:45 ㅣ최종 업데이트 12.07.08 15:45


"Hi, My name is Hyun In-Ah(안녕하세요, 저는 현인아입니다)."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홍보대사 위촉식에 참가하려고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는 거스 히딩크 감독(66·안지 마하치칼라)을 향해 당찬 인사를 건네는 이가 있었다. 나경원 조직위원장도 긴장시킨 히딩크 감독 앞에서 싱긋싱긋 웃으며 먼저 인사하는 여유를 보인 사람은 스페셜올림픽 출전선수 자격으로 참석한 현인아 선수(15·창동중)였다.
 
말 실수에도 터져 나온 기자회견장의 박수

  
▲ 기자회견에 참석한 현인아 선수가 히딩크 감독 인사말을 듣고 있다
ⓒ 정혜정
 히딩크

"저는 스페셜올림픽 쇼트트랙 선수 현인아입니다. 내년 대회 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히딩크 감독님! 우리 스페셜올림픽, 응원을, 선수들, 많이 응원하세요."

지난 밤 엄마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연습한 문장이었지만 회견장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연습을 계속했다. 보고 읽는 것보다 서툴더라도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수십 대 카메라 앞에서 긴장한 탓에 약간 실수를 했지만, 현 선수의 인사말이 끝나자 회견장에 박수소리가 터졌다.

히딩크 감독에게 기념배지를 달아주고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단상에서 내려온 현 선수는 "긴장이 됐어, 그런데 좋았어"라고 짧은 소감을 전한 뒤 히딩크 감독에게 받은 사인볼을 들고 짧은 치마를 나풀거리며 기자회견장을 누비고 다녔다. 어머니 허영미(47) 씨는 웃으며 "바지를 입힐 걸 그랬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스페셜올림픽 히딩크 홍보대사 위촉식'을 마치고 나온 현 선수의 어머니를 만났다.
 
부담스러운 시선 피해 연고 없는 포항으로 이사하기도

  
▲ 히딩크 감독에게 기념배지를 달아 주는 현인아 선수.
ⓒ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회
 히딩크

특수학급이 있는 일반 학교에 다니는 인아는 1년 유예해 중학교 1학년 과정을 밟고 있다. "원래는 범띤데 친구들이 다 토끼띠여서 인아는 자기가 14살(99년생·토끼띠)인 줄 안다"는 엄마 말을 듣던 인아가 불쑥 "토끼는 꼬리가 짧고 호랑이는 꼬리가 길어요"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인아가 어렸을 때부터 산만했다고 전했다.

"손만 놓으면 어디로 갈지 몰라요. 말로 의사표현을 못하니까 행동으로 다 보여주더라고요. 인아가 5살 때 오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어요. 다칠까 봐 집에서 태우다가 한두 달 연습하고 나서 밖으로 데려갔어요. 인아가 에너지가 굉장히 넘치거든요. 야생마예요. 인라인을 못타는 제가 뛰어서 따라다니기 힘들 정도죠. 그러다 잠깐 시야에서 놓쳤는데 인아가 차도 쪽으로 뛰어들고 있는 거예요. 큰일 날 뻔 했어요."

도시에서는 인아를 자유롭게 키우기 힘들 거라 생각한 허 씨는 남편에게 본사에서 지점으로 근무지를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연고도 없고,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인아를 자유롭게 교육하고 싶었어요. 도시에는 차도 건물도 많아 인아에게 위험하고 무엇보다 사람들 시선이 불편했거든요."

인아는 5살 때 포항으로 내려갔다. 2002 한일 월드컵을 포항에서 겪은 인아. 당시에는 히딩크 감독과 이런 인연이 생길 줄 몰랐다. 2002년부터 2년 간 포항에서 생활한 가족은 인아 학교를 위해 2년 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장애아동을 위한 학교교육 여건은 지방보다는 서울이 낫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가을, 학교에서 마련한 스케이트 단체강습에 참가하게 된 인아. 어렸을 때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덕분인지 스케이트화를 신자마자 빙상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스케이트 타는 인아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는 담임선생님 얘기를 듣고 인아의 산만함을 치료하기 위해 스케이트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케이트 날이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인아에게 날은 날카로운 흉기가 아니라 집중력을 길러주는 교구가 됐다.

"스케이트 날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 전정기관을 자극해 평형감각과 균형감각을 길러주고 이 과정에서 집중력도 키울 수 있더라고요. 산만하던 인아가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일반 선수 뒤꽁무니 따라가는 것도 영광"

국내 실내빙상장은 선수들과 코치들이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훈련할 정도로 추운 편이다. 하지만 인아를 가르치러 빙상장에 들어선 코치 선생님은 땀범벅이 된 채 빙상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빙상장에는 활주 방향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인아가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고, 피겨 선수들이 강습받고 있는 라인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인아를 붙잡으러 다니던 코치가 나중에는 반팔 차림으로 밖으로 나오셨어요. 죄송한 마음에 '인아 가르치기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처음이라 그렇다, 괜찮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다행이었어요. 못 가르친다고 하실까 봐 내내 걱정했거든요."

  
▲ 기자회견을 마친 현인아 선수가 히딩크 감독의 사인볼을 들고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마스코트 Ra(라?왼쪽) In(인) Bow(바우?오른쪽)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정혜정
 스페셜올림픽

'천방지축 현인아'를 '쇼트트랙 선수'로 만들기 위한 기초 훈련이 시작됐다. 코치 선생님은 '코너를 돌 때는 3번째 블록에서 오른발을 디뎌라' '스피드를 내려면 자세가 중요하다, 자세를 낮춰라' 식의 말보다는 행동으로 인아를 가르쳤다. 집중력이 약하고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인아를 위한 맞춤형 교육이었다. 수십 번 반복된 행동을 보여주면 인아도 그 동작을 조금씩 흉내 내기 시작했다.

동천학교 아이스링크장에서 훈련을 시작한 인아는 이후 고려대 실내빙상장을 거쳐 지금은 의정부 실내빙상장에서 훈련 중이다. 여러 빙상장에서 연습했지만, 일반인과 함께 훈련하는 장애인은 인아가 최초다. 기록 경쟁인 쇼트트랙 특성상 홀로 하는 스피드 훈련은 의미가 없다.

일반인과 어울려 타는 최초의 장애인 선수

일반 선수들 사이에서도 실력 좋은 선수 뒤꽁무니를 따라 타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잘 타는 선수는 뒤에 다른 선수들이 있으니까 좋고, 따라오는 선수도 실력이 좋은 선수와 함께 타 기록 향상에 도움을 얻는 것이다. 인아가 일반 선수들과 어우러져 탈 수 있게 된 데는 최태현 코치 선생님 공이 컸다.

"인아가 너희들만큼 스케이트도 잘 타고 대회 나가서 상도 탔어. 장애는 있지만 잘하는 선수다."

장애를 가진 선수와 함께 타게 되면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고 연습하는 데 지장이 있을 거라는 선입견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한마디에 같이 훈련하게 된 일반 선수들도 편견 없이 인아를 대하기 시작했다.

"빙상에 오르기 전에 달리기 지상 훈련을 하거든요. 힘들어서 못 뛰는 인아 앞뒤로 초등학교 동생 둘이 붙더라고요. 누나가 뒤쳐지면 혼날까 봐 누나 곁에서 달려주는 거였어요. 또 외국 다녀오면 초콜릿을 사와서 서로 나눠 먹기도 하고, 그런 정이 있어요. 작은 사회죠. 인아가 스케이트를 통해서 사회생활도 배우고 있어요. 스케이트는 표현을 잘 못하는 인아가 인간관계를 맺는 데도 좋은 역할을 해요."

일반 선수들 못지않은 훈련 강도다. 시합에 출전하지 않을 때도 훈련은 계속 한다. 오후 5시부터 50분 동안 지상훈련으로 몸을 푼 뒤 6시에 빙상장에 들어간다. 50분씩 두 번 스케이트를 타고 30분 동안 마무리 운동을 해야 하루 훈련이 끝난다. 처음에는 몸살도 나고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거뜬히 훈련에 적응한다.

  
▲ 초등학교 2학년 때 스케이트를 처음 탄 현인아 선수는 스페셜올림픽 쇼트트랙에 출전한다.
ⓒ 정혜정
 스페셜올림픽

2011 아테네 하계 스페셜올림픽에 롤러스케이트 선수로 참가해 금메달을 땄던 현인아. 하지만 이제 롤러스케이트는 취미로 남겨놓고 쇼트트랙에 몰두하기로 했다. 쇼트트랙 자세가 망가질 수 있다며 코치 선생님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내년 1월 29일 개막하는 평창 스페셜올림픽에 쇼트트랙 500m, 700m, 1000m에 출전할 예정이다.

"저는 다른 대회보다 스페셜올림픽을 특히 좋아해요. 출전하는 선수들 모두 다 인아 같은 아이들이거든요.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아요. 자식들 어떻게 키우는지 다 알기 때문에 색안경을 쓰고 보지 않아서 마음이 편해요."

지하철에서도 계속되는 불편한 시선들

현 선수의 어머니는 발달 장애를 갖고 있는 딸을 키우면서 사람들 시선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인아랑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었어요. 장애인우대권을 뽑고 개찰구를 통과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쫓아와서 물어보시는 거예요. '할머니 할아버지만 받는 걸, 왜 뽑아 가냐'고요. 할머니께 '할머니,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요. 할머니만 받는 게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지하철을 탔어요. 그런데 같은 칸으로 들어오셔서 또 이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사람들도 가득 차 있는데... 그래서 '저희 애가 장애를 가졌습니다. 65세 이상 노인 분들도 우대권을 받지만 장애인도 동반 1인까지 받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어요. 그제야 큰소리로 '아, 몰랐지' 하시며 다른 칸으로 넘어가시더라고요. 지적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일반사람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아요. 특히 할머니들은 멈춰 서서 끝까지 쳐다보세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모든 면에서 날이 서 있으면 인아 교육하는 데도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냥 '궁금하신가 보다'하고 넘긴다고 전했다.

주위에서 "스페셜올림픽에서 금메달 따고, 전국체전에서 메달 따면, 나중에 그거 가지고 뭐할 건데? 계속 선수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배워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인아를 위해 꾸준히 운동을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스타도 함께하는 스페셜올림픽

  
▲ 평창 스페셜올림픽 글로벌 명예 홍보대사로 활동중인 김연아 선수와 히딩크 감독.
ⓒ 정혜정
 김연아

"소외 받는 사람들(장애인)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일반인들보다 적은 편이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내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이 분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데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스포츠는 그 분야 엘리트들만 모여서 하는 게 아니다. 스페셜올림픽은 지적 장애인과 소외된 이들도 함께할 수 있다는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다."

히딩크 감독이 스페셜올림픽을 적극 후원하게 된 이유다. 일반 올림픽보다 미디어의 관심이 적은 스페셜올림픽. 지난달 21일 서울시 종로구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국제스페셜올림픽위원회(SOI) 방한기자회견'에서 스페셜올림픽 홍보대사이기도 한 김연아(22·고려대) 선수도 관심을 촉구했다.

"많은 분들이 기자회견에 참석해주신 점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들에게, 용기를 내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응원과 큰 박수를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인아의 어머니는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은 조용하고, 그렇지 않아도 될 곳에서 잘못된 관심을 표출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와 히딩크 감독, 그리고 김연아 선수가 전하는 메시지는 상통하는 점이 많다. 스포츠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가고 있는 스페셜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노력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by heyuna 2012. 7. 8. 17:57


히딩크의 뜻밖의 선택?... "충분히 예상한 일"
[현장] 평창 스페셜올림픽 홍보 나선 한일월드컵 영웅

12.07.05 08:53 ㅣ최종 업데이트 12.07.05 10:19


박태환은 수영, 이용대는 배드민턴, 장미란은 역도 국가대표 선수다. 이들은 60억 세계인의 대축제인 올림픽에 출전해 실력으로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해 본 선수들이다. 이들이 시상대 정상에 선 광경을 지켜본 국민은 그들의 위대한 성취를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환호했다. 그들이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겪어보지 않았지만 미디어를 통해 숱하게 접했기 때문이다.

우정령(21·은평대영학교)도 국가대표 선수다. 2012 한국스페셜올림픽 전국하계대회에는 수영 선수로 출전했고, 내년 1월 29일 개막하는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에는 스노우슈잉(snowshoeing·스노우슈즈를 신고 눈 위를 달리는 경기) 종목에 참가할 예정인 멀티 플레이어다. 현인아(15·창동중) 선수도 마찬가지다. 2011 아테네 하계 스페셜올림픽에서는 롤러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고,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에는 쇼트트랙 스케이팅 선수로 출전한다. 이들은 한 종목도 아닌 여러 분야에서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한다.

'특별한' 올림픽을 위한 '특별한' 사람의 방한

스페셜올림픽이 '특별한'(special) 이유는 지적 발달 장애인들을 위한 스포츠 축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들을 알리고, 이들이 출전하는 2013 평창동계 스페셜 올림픽을 홍보하기 위해 '특별한' 사람이 한국에 왔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거스 히딩크 감독(66·안지 마하치칼라)이 바로 그다.

  
▲ 나경원 조직위원장과 히딩크 감독이 위촉식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정혜정
 히딩크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회는 4일 오전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히딩크 감독을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글로벌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이 회견에는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회 나경원 위원장과 히딩크 감독, 그리고 우정령·현인아 선수가 참석했다.

지적 발달 장애 딸을 둔 나 위원장은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할 때 떨린 적이 없었는데 히딩크 감독님께서 스페셜올림픽 홍보대사를 맡게 됐다는 것을 알리는 오늘 이 자리는 떨린다"며 "스페셜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 히딩크 감독님이 홍보대사를 맡아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인사말을 전했다.

레알마드리드(스페인), 첼시FC(잉글랜드) 등 명문팀과 네덜란드· 한국· 호주· 러시아· 터키의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온 히딩크 감독. 세계 프로축구 무대를 종횡무진했던 그가 스페셜올림픽 홍보대사를 수락한 것은 뜻밖이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히딩크가 현실로 만든 '장애인 전용 축구장'

그러나 히딩크의 경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고국 네덜란드에서 장애인올림픽위원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 국가대표 감독이 된 뒤에는 국내 각종 장애인 시설들을 찾아다니며 지원 활동을 했다.

  
▲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글로벌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된 거스 히딩크 감독.
ⓒ 정혜정
 히딩크

그는 오래 전부터 네덜란드에 히딩크 재단을 설립해 전세계 불우 청소년이나 장애아동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쳐온 사람이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보여준 우리 국민의 성원에 감동받은 그는 이에 보답하기 위해 2003년 한국에도 히딩크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2008년 충주성심맹아원을 시작으로 포항·수원·전주·울산·광주·부산·대구·대전·목포·순천 순으로 시각장애인축구장인 히딩크 드림필드(Hiddink Dream Field)를 건립하고 있다. 그가 장애인을 위한 축구장을 건립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외 받는 사람들(장애인)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일반인들보다 적은 편이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내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이 분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데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축구는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완벽한 스포츠다. 한국 대도시에 드림필드를 설립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국을 '제2의 조국'이라 말하는 히딩크 감독. 한일월드컵이 끝난 지 10년이 흘렀지만 그의 한국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당부할 말이 무언지 묻는 질문에 히딩크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한국인의 정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따로 격려 메시지를 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국인은 한가지 목표가 정해졌을 때 100% 이상으로 달성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을 당시 선수들을 보며 '자신감을 얻고 정신력까지 겸하면 한국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을 좋아하게 됐다."

"스포츠는 엘리트만 하는 게 아닙니다"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 스페셜올림픽 홍보대사가 된 만큼 최선을 다해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을 홍보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히딩크 감독. 그는 스페셜올림픽을 지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스포츠는 그 분야 엘리트들만 모여서 하는 게 아닙니다. 스페셜올림픽은 지적 장애인과 소외된 이들도 함께할 수 있다는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을 적극 후원할 예정입니다."

  
▲ 히딩크 감독이 현인아 선수가 달아준 배지와 우정령 선수가 걸어준 목도리를 하고 참석자들과 기념촬영 중이다.
ⓒ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회
 히딩크


2013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에 함께하게 된 히딩크 감독에게 기자회견에 참석한 선수들도 감사의 인사말을 전했다.

"제가 존경하는 히딩크 감독님과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축구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마음껏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대회가 될 수 있도록 홍보대사인 히딩크 감독님이 많은 도움을 주실 거라 믿습니다." (우정령 선수)

"저는 스페셜올림픽 쇼트트랙 선수 현인아입니다. 내년 대회 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히딩크 감독님! 우리 스페셜올림픽, 응원을, 선수들, 많이 응원하세요." (현인아 선수)

선수들의 서툰 인사말이 끝나자 기자회견장에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통역을 통해 인사말을 전해들은 히딩크 감독도 이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직접 사인한 축구공을 선수들에게 선물했다. 선수들도 화답했다. 히딩크 감독은 현 선수가 달아준 배지와 우 선수가 걸어준 목도리를 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평창동계 스페셜올림픽 슬로건을 외쳤다.

"Together We Can!(함께하는 도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by heyuna 2012. 7. 5.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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